해마다 8월 15일이 오면 대한민국의 독립을 기념하는 광복절 행사가 열립니다. 대한민국이 일본제국주의 지배에서 벗어난 해방을 기념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보통 우리는 하루 쉬는 공휴일이라는 것 이외에 광복절의 소중함을 그다지 실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당당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경제적으로도 높은 국민소득을 가진 선진국입니다. 가요와 드라마 등으로 전세계에 한류를 전파하는 문화강국이기도 하지요. 그렇다보니 자유와 풍요가 당연한 것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없으면 과연 무엇이 그렇게 힘들까요? 자유가 없으면 무엇을 빼앗기게 될까요? 단순히 못먹고 못살게 되는 것이 문제일까요? 사실 식민지가 되어도 빈부차이는 있었습니다. 여전히 잘사는 사람은 경제적으로 잘 살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국가가 지켜주는 우리의 소중한 인권을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애니메이션 '소녀 이야기'는 바로 이런 점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작품입니다. 컴퓨터를 이용한 디지털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일반적으로 경쾌하고 발랄한 내용인 픽사의 작품과는 전혀 다릅니다. 바로 우리가 실제로 겪은 이야기이자, 한 소녀가 말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어떤 할머니의 회상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정서운 이란 이름의 이 할머니는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15세의 소녀였습니다. 스스로 말하기를 아무런 고생도 안하고 편안하게 지내왔다고 합니다. 그저 아버지가 일제시대에 왜놈들 하는 일에 반대했었다. 이것으로부터 '소녀 이야기'의 사연이 만들어집니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제는 군수물자에 필요한 자원이 없어서 민간에서 대대적인 징발을 합니다. 특히 금속이 부족했는데 이때 일반 가정에서 쓰던 놋그릇까지 가져갑니다. 그것을 녹여서 총이나 대포 등 각종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징발에 소녀의 아버지는 반발해서 놋그릇을 감췄는데 그것을 누군가 밀고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아버지는 감옥에 가게 됩니다. 한 번 갔던 면회에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호통을 칩니다. 딸과의 면회인데 어째서 그렇게 대했을까요? 일제에 대한 분노와 딸에 대한 걱정, 스스로의 앞날에 대한 불안 같은 것이 겹쳐서 그랬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녀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걱정이 앞섰습니다.



며칠 후 이장이 와서 제안을 합니다. 일본 공장에 센닌바리를 만드는 공장이 있는데 그 공장에 가서 2년 반 정도를 다녀오면 된다. 그러면 떠나는 날 아버지를 바로 풀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걸 믿고 소녀는 아버지를 위해서 희생하기로 결심합니다. 



실제로 일본에는 그 당시 남자를 강제로 군대로 보내는 징병과는 별도로 노동력을 동원하는 징용제도가 있었습니다. 주로 군수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강제로 노역을 하는 제도였습니다. 따라서 일제의 징발에 협력하지 않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딸이 징용을 가는 것으로 한다는 제안은 그럴 듯 해 보입니다.



하지만 센닌바리는 한 조각의 천에 천 명의 여성이 붉은 실로 한 땀씩 박아 천 개의 매듭을 만들어 무운 장구와 무사함을 빌며 출정 군인에게 주었던 물건입니다. 일종의 부적이지요. 정규적인 군수물자도 아닐 뿐더러 공장에서 대량생산으로 만드는 제품이 아닙니다. 정말로 센닌바리를 만드는 공장 자체가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복잡한 사정을 소녀와 그 집안 사람들이 알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어쨌든 자청해서 가게 된 소녀는 그것으로 아버지가 풀려날 것으로 믿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풀려나오지 못하고 주재소에서 죽었습니다. 처음부터 속임수였던 것입니다.



배를 타고 자바해를 거쳐서 자카르타까지 가게 된 소녀는 한참동안 트럭을 타고 스라망이라는 곳까지 가게 됩니다. 단지 바다를 건너서 멀리 가게 되어 일본으로 가는 줄 알았지만 그곳은 일본군인이 있을 뿐 일본땅이 아닌 먼 나라였습니다. 차에서 내려서야 알게 되었지만 어떤 방법도 없었습니다.



소녀는 황군오락소라고 간판이 적힌 곳에 감금당합니다. 바로 우리가 지금 종군위안부라고 부르는 그런 처지가 된 것입니다. 첫날 술에 취한 일본장교로부터 시작해서 소녀는 차례로 일본군인들에게 강간을 당합니다.



맨정신으로 그것을 감당할 수 없게 된 소녀에게 일본군은 아편을 주사합니다. 당시 일본군은 치료용 아편을 비롯해서 중요한 전투에서 약의 힘을 빌어 싸우도록 마약을 많이 썼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정조를 빼앗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궁극적으로 몸을 완전히 망가뜨리는 아편을 15살 소녀에게 강제로 투여한 것입니다.



아편중독이 된 소녀는 환각상태에서 계속 위안부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예 줄을 서서 계속 소녀의 몸을 빼앗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이런 환경이기에 당연히 위안부의 목숨도 신경써주지 않습니다. 함께 온 소녀 가운데 두 명이 죽었지만 장례식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그저 개 한마디 죽으면 그렇듯이 가져다 묻었을 뿐입니다.



소녀는 말라리아 약을 일부러 다량 과용하는 방법으로 자살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전신에서 피를 쏟았음에도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고 살아나게 됩니다.



1주일에 한번 큰 병원에 가는 중에 보는 인도네시아 원주민들이 그렇게 반가웠다는 소녀. 그것은 아마도 그나마 자유로운 바깥세상을 향한 동경이었을 것입니다.



전황이 나빠지자 일본군은 아예 위안부를 몇 명씩 끌고 방공호에 들어가서는 총으로 쏴서 죽여버립니다. 증거인멸을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점차 죽음이 다가오는 소녀는 공포를 느끼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중 부대에 있던 한국군인이 바깥으로 연락해서 연합군이 공격해온 덕분에 소녀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소녀는 다시 집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집은 거의 무너졌고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으며 하인들은 흩어졌습니다. 고아가 되어버린 소녀는 심지어 아편으로 망가진 몸과도 싸워야 했습니다. 5개월 정도 걸려 아편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소녀의 얼굴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습니다.



나중에는 그저 목숨만 부지하자. 목숨만 있으면 내 몸을 빼앗아가도 내 마음만은 못 빼앗아간다는 그런 정신으로 살았습니다. 모든 의지할 곳을 잃은 소녀는 그래도 강인하게 희망을 가지고 일어선 것입니다. 



이것은 1924년에 태어나 2004년에 세상을 떠난 우리나라 소녀 정서운의 실제 이야기입니다. 결코 유쾌하지도 않고 재미있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꼭 알아두어야 하고 새겨두어어야 할 역사입니다.



상영시간 10분의 이 애니메이션은 김준기 감독과 청강문화산업대학에서 만들었습니다. 상업적인 이익은 전혀 없을 테지만 누군가 만들어서 남겨두어야 할 의미있는 작품이지요. 


이 작품의 연출방식은 상당히 단순합니다. 실제 정서운 할머니가 말한 회상을 육성 그대로 들려주면서 그 이야기속 장면을 컴퓨터 그래픽을 재현한 것입니다. 인물 모델링은 비교적 귀여운 모습이라서 동화를 보는 듯 합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진지하고도 숙연합니다. 




이야기속의 소녀는 특별히 일제에 대한 분노를 외치지도 않고 국가와 민족의 소중함을 강조하지도 않습니다. 목소리도 비교적 평안합니다. 하지만 일부러 분노를 담아 그런 말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기구하고 처참한 소녀 이야기 자체가 충분히 분노과 슬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나라가 없을 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소녀 이야기는 상상을 그린 판타지가 아닙니다.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정말 나라를 빼앗겼을 때 이렇게 한 소녀가 아버지와 가정을 잃고, 나아가서 정조와 건강을 비롯한 모든 것을 철저히 짓밣혔습니다. 


다시 우리에게 나라가 없어진다면 우리의 이웃에 있는 소녀, 우리의 여동생, 우리의 누나가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녀 이야기가 던져주는 교훈이 아닐까요? 추상적으로 일제를 미워하자거나 나라를 사랑하자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우리에게 다시는 소녀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런 소녀가 나오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 작품이 나오게 된 과정 역시 흥미롭습니다. '소녀이야기'는 김준기 감독과 청강문화산업대학교 학생들이 함께 만들었습니다. 아티스트레지던스 프로그램을 통해 애니메이션전공 학생들이 제작스텝에 참여한 것입니다.

아티스트레지던스 프로그램은 국내외 유명 감독 등 현장에서 활동하는 아티스트들이 청강문화산업대학교에 상주하며 학생들과 호흡을 맞춰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입니다. 아티스트들은 작품을 제작에 집중하고, 학생들은 현장 전문가로부터 실무 기술을 익히며 작품 제작 경험도 쌓을 수 있습니다.


소녀이야기는 이렇듯 미래를 이끌어갈 우리의 인재들이 역사의식을 가지고 만든 작품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애니메이션의 기술 자체도 상당히 높습니다. 각 인물의 개성과 역할에 따라 디자인된 캐릭터들이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렌더링되어 얼굴 표정과 동작 변화까지 세밀하게 잘 보여줍니다. 단순히 내용뿐만이 아니라 애니메이션 기술적으로 보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 작품입니다.


때문에 소녀 이야기는 여러 곳에서 상을 받은 수상경력이 있습니다. 2011년 대한민국 콘텐츠어워드에서 애니메이션부문 콘텐츠진흥원상을 받았고, 2012년 독일 슈트트가르트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는 단편 경쟁부문 진출했으며, 히로시마 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비경쟁부문에 초청되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열린 카툰온베이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는 교육&사회이슈부문 상을 받았으며 현재 위안부박물관 내 상시 상영되고 있습니다.

이렇듯 소녀 이야기는 우리가 가진 기술로 민족의 아픔을 보여주고 자연스럽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의미있는 작품입니다.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서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끌려간 위안부 할머니의 '소녀 이야기'를 한번쯤 보고 결코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