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아버지의 서재에서 책을 꺼내서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인터넷도 없고 대여점도 없었다. 때문에 이제 막 글을 배워 읽을 거리를 찾는 나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있었다. 쉬운 것 어려운 것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팡세나 수상록 같은 어려운 책을 초등학생인 주제에 의미도 모르고 읽었다.


하지만 그런 나도 펼치자마자 질려버린 책이 있었다. 내용이 어려운 것은 둘째치고 책을 구성하는 글의 모습이 너무도 이질적이었기 때문이다. '民族의 發展이 百尺竿頭에 達했으니…' 같이 문장이 조사와 동사 뻬고는 모두 한자로 쓰여진 모습이었다. 이른바 '국한문혼용체'의 책이다.



블로그글


이게 도저히 우리말이 맞나 싶을 정도의 그 책은 내가 중학교에 입학해서 한문을 공부하면서부터 조금씩 해석하는 게 가능했다. 마치 암호책이나 마법책 같이 여겨서 덮었던 책은 의외로 별 내용이 아니었다. 그저 외국 유명한 사람의 삶을 적어놓은 위인전이었을 뿐이다.


문제는 이런 것이 그저 옛날 이야기가 아니란 점이다. 물론 이제 국한문혼용체는 관련 학계에서나 부분적으로 쓰일까 하는 수준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 일부 블로그글- 특히 전문성을 가졌다는 IT 관련 글을 읽으면서 나는 다시금 어렸을 적의 느낌을 받는다.


'iphone의 UI에는 Apple만의 독특한 UX가 담겨있습니다. Ipad는 당연히도 … ' 이런 문장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이걸 쉽게 해석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그냥 업계 사람이거나 IT에 상당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다. 아무 상관없는 일반인이나 초등학생이 읽었을 때 위의 글은 그냥 암호문이다.



블로그글


그냥 한글로 써도 되는 아이폰을 왜 굳이 영어로 써야할까? Apple이란 회사 이름을 애플이라고 적으면 안되는 걸까? UI라는 약자를 사용자 인터페이스라고 쓰지 않는 건 한글로 풀어쓰면 긴 글자를 타이핑 하는 수고가 더 들어서 싫은 것일까? UX를 사용자경험이라고 적으면 자기 수준이 떨어져보인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런 글을 읽으면 나는 그 사람이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글을 쓰는지 약간 궁금하다.


물론 해당하는 단어를 일부러 강조하거나 그렇게 써야만 할 때도 있다. 예컨대 'iphone에서 i를 떼어내 보자. 무엇이 남는가?' 이런 식으로 글을 쓸 거라면 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런 글이 아니다. 국한문혼용체에 이어서 블로그 글에서는 '국영문혼용체'가 존재한다.


블로그글, 쉬운 말로 써야하는 이유는?


쉽게 쓸 수 있는 글을 일부러 어렵게 쓰는 사람의 의도는 크게 세 가지 정도이다.



블로그글


1. 나는 전문가다. 그러니까 아는 사람만 보고 함부로 딴지걸지 마라.

2. 나는 한글 실력이 부족합니다. 적당한 단어를 찾기 힘드니까 읽는 쪽이 알아서 이해하세요. 

3. 솔직히 나도 지금 내가 무슨 내용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1번은 관련업계 사람하고만 대화하겠다는 의도이다. IT글이라면 IT를 잘 아는 사람만 읽으라는 뜻이다. 마치 의사들이 한글로 써도 될 처방전을 일부러 의학용어에 필기체로 휙 갈겨써서 주는 것처럼 말이다. 병원에서 그걸 받아든 환자는 의사에게 성가신 질문을 안하게 된다.


2번은 해외유학파를 비롯해서 관련 업계 공부만 하고는 정작 그걸 표현할 국어실력이 부족한 사람이다. 한글 능력에 문제가 있는, 일종의 장애인이다. 그러니까 그냥 불쌍하게 생각하고 읽는게 났다. 하지만 문제는 교수를 비롯해서 우리 사회의 식자층과 지도층에 상당히 많다는 게 문제이다.  조금만 노력하면 고칠수 있는 장애를 고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드러내는 사람이 많으면 정상인이 바보취급 당한다.

 

3번은 노력부족이다. 내용의 본질을 하나씩 이해하면 쉽게 쓸 수 있는데, 자기도 잘 모르면서 글을 써야 하는 경우이다. 주로 학교의 레포트를 작성할 때나 기자가 모르는 내용을 어쨌든 빨리 기사로 써야할 때 이런 참사가 발생한다. 



블로그글


블로그 글을 쉬운 글로 써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블로그 글은 소통하기 위해 모두에게 열어놓는 글이기 때문이다. 특정한 지식을 남보다 더 안다고 해서 무슨 귀족층이 아니다. 쉽게 쓰지 못하는 것이 창피한 것이지, 어려운 글을 읽지 못하는 독자가 창피한 게 아니다.



블로그글


앞으로 최소한 블로그 글에서 암호문이나 마법문구 같은 문장은 그만 보았으면 좋겠다. 남들이 해석하지 못하는 걸 나는 해석했다고 기뻐하고 싶지는 않다. 반대로 분명 중요한 글인데 해석도 못해서 불안해하고 싶지도 않다. 그런 경험은 병원 처방전이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