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교훈을 얻는다는 건 정말 어렵다. 단기적인 면에서 사람은 지혜로운 편이지만 조금만 그 시점이 길어지면 냉정을 잃고 속단한다. 자기 주위의 경험만으로 모든 장단점을 규정한다. 이런 것은 때로는 치명적인 판단실수나 어이없는 자만심으로 향한다.



전자책


임진왜란때 유명한 탄금대 전투가 있다. 부산진에서 올라오는 일본군을 막기 위해 기마대를 모아 출진하던 당시의 명장 신립에게 충고가 제기되었다. 일본군은 조총을 쓰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신립은 그 말에 '조총이 대단하다고 하나 쏘면 쏘는대로 맞겠소이까?' 라고 답했다. 그리고 벌어진 탄금대 전투의 결과는 비참했다. 기마대와 궁수가 주축이 된 조선군은 전멸했고 신립은 자결했다. 일본군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군사학적으로 보자면 이때는 활과 기병이 중심이 되는 중세에서 화약과 총을 가진 보병이 중심이 되는 근세로 가는 과도기였다. 조선은 그때까지 키워온 활에 자신이 있었기에 일본군이 가진 조총의 단점만을 보았다. 당시 조총은 연사능력과  사거리도 좋지 못하고 만들기도 까다로웠다.  활에 비해 나은 점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숙련된 궁수는 십년을 키워내야 하는데 적당한 조총병은 3개월이면 만들 수 있었다. 이 차이가 결국 미래를 좌우했다.



전자책


전자책이 종이책을 대체할 것인가? 이 문제를 놓고 벌이는 일련의 논쟁은 시대의 흐름을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달려있다. 결국 사람이 역사에서 교훈을 별로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국내의 한 언론에서 전자책을 부정적으로 전망한 기사가 나온 것을 우선 보자(출처)


전자책이 정말 종이책을 없앨까.1998년 미국의 누보미디어가 처음으로 '로켓 e북'을 내놓자 출판계에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 이래 15년째 반복되고 있는, 그래서 비명이라기엔 앙칼진목소리가 무던해져버린 비명이다.


이런 시나리오는 현실화되지 못했다. 아니,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에 그쳤다. 그러나 한번씩 고개를 쳐든다. 처음 고개를 든 것은 2007년 아마존이 전자책 단말기인 '킨들'을 내놨을 때다. 뒤질세라 한국에서도 이런저런 단말기가 나왔다. 전자책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호들갑이 들끓었다. 결과는 실패. 단말기 생산이 은근슬쩍 중단되더니 차츰차츰 시장에서 사라졌다. 


그뒤 사그라졌던 전자책 얘기가 다시 불거져나온 것은 순전히 스마트기기 덕이다. 휴대전화, 패드, 태블릿PC 등 값비싼 전자기기가 광범위하게 보급되자, 그 훌륭한 기계로 고작 웹서핑이나 해야 하느냐는 말이 나오고 결국 엔터테인먼트 콘텐츠의 한 요소로 전자책이 다시 불려나온 것이다. 아니, 화려한 동영상 콘텐츠에 밀려 자꾸만 변방으로 내밀리니 뭐라도 해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일어섰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한동안 사라졌던 전용단말기도 슬금슬금 다시 등장했다.



전자책


그러나 여전히 출판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지금 느껴지는 전자책 붐은 고전을 덤핑으로 팔아치운 데 따른 거품이라는 진단이다. 이런저런 시장 조사 결과를 보면, 같은 콘텐츠라면 전자책이 아니라 종이책으로 보겠다는 응답이 압도적으로 많이 나온다. 그나마 자본력을 갖춘 곳에서 저작권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고전을 이렇게 싼값에 폭탄세일하듯 팔아치워버리면, 나중에 새 콘텐츠를 제값 받고 팔 수 있겠느냐는 반문도 나온다. 최근 전자책 행보에 출판계가 끙끙 앓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콘텐츠를 내놓을 출판사들이 모두 몸을 사리고 있으니 시장선점 욕심 때문에 몸이 바짝 달아오른 플랫폼 사업자가 그간 문화사업자로서 쌓아왔던 좋은 이미지가 무너지는 것을 감수해가며 가격을 후려치는 방식으로 일단 판을 벌린 경우"라고 정리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연구결과를 보면 전자책이 종이책을 대체하는 게 아니라 종이책을 즐겨보는 독자가 전자책도 사보고, 전자책을 보는 독자가 종이책도 사보는 일종의 하이브리드 독자라는 사실"이라면서 "저가전략, 할인공세는 결국 자충수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전자책 시장이 안 뜬다고 초조해하는 이들은 독자들이나 출판사들이 아니라 오직 전자책 시장 관련 사업자들뿐"이라 꼬집었다.


그래서 여전히 전자책은 시험 중이다. 가령 민음사는 기존 콘텐츠를 디지털화해서 공개하는 대신 '디지털 싱글'이라는 새로운 스타일을 시도했다. 잡지 기사보다는 길고 단행본보다 짧은 분량의 글을 선보이는 것이다. 출퇴근시간, 찻집에 앉아 보내는 시간 등에 스마트기기를 통해 간단하게 읽을 수 있는 콘텐츠를 집중 개발, 보급한다는 전략이다. 



전자책


길게 써놓은 이 기사의 요점은 결국 한 줄의 문장이다. '당장이라도 종이책을 몰아낼 듯 등장했던 전자책이 아직 별볼일 없네?' 라는 것이다. 하긴 아이폰이 나와서 안드로이드폰이 나오고 피처폰이 점점 사라지는 그런 속도를 본다면 그런 판단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서 '역시 종이책은 계속 있어야 해. 종이책 만세!' 하고 외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옳은 판단일까?


전자책은 언제 종이책을 대체할 수 있을까?


아무리 옛날에 생긴 도구라고 할 지라도 일말의 합리성을 가진다면 여전히 존재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전 세대의 물건이 더 좋다고 느낄 수도 있다. 거의 인간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활이라는 무기는 임진왜란이란 과도기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조선은 삼수병 체제로 포수(조총), 사수(궁수), 살수(창병) 를 운영했다.


총이란 개념 자체는 분명 활보다 뛰어난 미래도구였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이 충분하지 못해서 활이 부분적으로 장점이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20세기에 활은 전쟁도구로서 더이상 쓰이지 못했다. 모든 면에서 총이 나아졌기 때문이다. 



전자책


전자책은 분명 종이책보다 모든 면에서 나은 미래의 개념이다. 쉬운 제작과 전송, 자원이 들지 않는 복사와 저장, 배포에 이르기까지 우수하다. 그렇다면 왜 종이책을 대체하지 못할까? 그것은 개념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종이라는 매체가 가진 몇가지 장점을 완벽히 대체할 전자매체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블릿 같은 액정방식은 물론이고 전자책 단말기의 전자잉크조차 아직은 종이에 비해 큰 단점이 있다. 가격이나 선명함, 보존성 등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전자책이 종이책을 완전히 대체하지 못한다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개념이 앞서 있으면 긴 호흡의 역사로 봐서 분명히 대세가 된다. 하지만 그것이 빠르게 대체하려면그 개념을 구현한 수단까지 압도적으로 앞서야 한다. 총이 활을 완벽히 대체한 것은 인류문명이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연사속도와 내구성, 생산성까지 완벽히 앞지른 다음이었다. 전자책 역시 결국은 종이보다 나은 전자 매체가 등장할 때 종이책을 완벽히 대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종이책은 그때까지 여전히 승리자일까? 그렇지 않다. 점점 종이가 아니면 안되는 영역과 일부 마니아들의 영역으로 역할이 축소될 것이다. 그러니까 전자책이 종이책을 대체하지 못하는 것이 반대로 종이책의 영광을 부르짖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전자책


특히 세계적인 추세와 달리 종이책이 과도하게 더 많이 살아있는 한국에서는 그 부분이 걱정된다. 자기 것에만 안주하고 있다가 호되게 당한 교훈은 임진왜란과 쇄국정책이면 족하지 않을까.



전쟁사에서 유명한 이야기 가운데 독일의 전차부대를 상대로 폴란드 후사르 기병대가 말을 타고 소총을 연사하며 달려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 그건 전쟁도 아닌 학살이었다. 나는 자칫 한국이 세계적인 전자책 흐름 속에서 종이책을 고집하다가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심각하게 걱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