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많이 하는 비유로 이런 것이 있다. ~을 버려야 ~이 산다. 혹은 ~을 잊어야 비로소 ~가 보인다. 와 같은 것이다. 나는 이런 형태의 비유를 잘 쓰지 않지만 그래도 이런 비유가 가진 의미를 비교적 좋아한다.


사실 이 말은 이미 불교의 기초 교리에 나와있다. 집착을 버려라. 라는 간단한 말이다. 사람이든 기업이든 어떤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면 당연히 발전없는 고민만 하게 된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스스로가 만드는 족쇄가 채워지는 것이다. 아마도 선불교를 수련한 스티브 잡스는 수없이 들었던 말일 것이다.


가상재화


한국의 KT가 요즘 갑자기 '가상재화' 를 주창하고 나섰다. 대한민국 굴지의 통신기업이지만 더욱 큰 미래는 통신이 아니라 가상재화를 비롯한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출처)


이석채 KT 회장은 2월 26일(현지시각)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MWC 2013' 기조연설에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전통적 네트워크에서 브로드밴드로 이동하고 있다"며 "브로드밴드 시대에는 통신의 비중과 가치가 갈수록 작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회장은 전세계 통신회사 및 휴대폰 제조사의 최고경영자(CEO)들을 대상으로 한 이날 연설에서 "카카오톡처럼 브로드밴드를 활용하는 OTT 사업자들이 번창하는 반면 통신서비스를 위주로 하는 KT와 같은 통신사들은 생존에 위협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KT가 아이폰 도입 이후 3년간 무선 네트워크에 4조원 이상을 투자했으나 수익은 정체되었다고 자평했다. 반면 네이버와 같은 포털 사업자들은 가상재화의 유통과 앱서비스를 제공하면서 큰 수익을 냈다고 지적했다. 


가상재화란 디지털 콘텐츠, 앱, IT솔루션, e-러닝, e-헬스 등 브로드밴드 위에서 생산, 유통, 소비되는 비통신 서비스를 통칭하는 것이다. 


가상재화


이에 따라 이 회장은 통신사 스스로 가상재화 제작자가 되거나 애플의 앱스토어처럼 가상재화 유통사업자가 되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브로드밴드 위에 가상재화의 거래를 위한 큰 시장을 만들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장터에서 온갖 것들을 사고 팔도록 하면서 사용료를 받자는 것이다. 


KT는 IPTV 서비스를 유선뿐만 아니라 모바일에서도 제공해 콘텐츠 대량 소비시대를 앞당겼고 미디어·콘텐츠 분야에도 진출했다. 또한 스마트 디바이스를 활용한 e-러닝 서비스를 제공해 계층간 교육격차 해소에도 기여하고 있다. 


가상재화 유통시장에도 뛰어들어 숨피(한류 영어정보 사이트), 유스트림(실시간 동영상 중계), 지니(스마트폰 전용 음악서비스)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한·중·일 공동 앱마켓인 OASIS를 통해 수많은 가상재화 제작자들에게 장터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글로벌 가상재화 시장이 열리면 일자리 창출 뿐만 아니라 교육격차 해소, 에너지 절감 등 수많은 사회적 문제에도 큰 도움이 되고, 세계 경제 발전의 새로운 엔진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가상재화라는 형태로 보다 넓게 표현하지만 결국 이것은 콘텐츠란 말과도 비슷하다. KT가 단순한 망공급자가 아니라 망을 통해 오가는 콘텐츠의 중개업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통신을 버려야 KT가 산다. 라는 주장이다.


가상재화


애플의 아이튠스나 아마존의 킨들, 구글의 플레이스토어와 같은 거대한 콘텐츠 시장을 가지면 무엇이 좋을까? 그 위를 오가는 콘텐츠의 가치에 비례해서 돈을 벌 수 있게 된다. 개별 콘텐츠 하나 뿐만이 아니라, 전체 콘텐츠의 질과 양이 좋아질수록 콘텐츠 시장을 가진 사업자도 많은 이익을 올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KT의 전망과 주장은 기본적으로 매우 좋은 선택이다. 기존 통신사나 이동통신사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국가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큰 미래를 볼 때 단순한 망공급자나 망임대사업자의 위치로 가게 될 것이다. 거기서 얻어지는 수익의 폭도 작아질 수 밖에 없다. 그에 비해 가상재화라 불리는 콘텐츠 시장은 갈수록 커져간다. 또한 가상재화의 거래에서는 판매액의 30퍼센트 내지는 40퍼센트를 가져갈 수 있다. 매력적이다. 


하지만 과연 KT가 말하는 가상재화가 소비자에게 어떤 의미로 들릴까? 그 점을 생각해보자. KT란 기업의 현재 이미지가 겹쳐진 가상재화-콘텐츠의 미래가 어쩐지 약간 불안하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가상재화


KT의 가상재화, 중립성은 보장될까?


KT가 일부러 가상재화란 개념을 꺼낸 것은 플랫폼에 딸린 개념인 콘텐츠보다 더 넓은 개념을 말하기 위해서 인듯 하다. 콘텐츠가 하드웨어에 종속된 반면에 가상재화는 그것이 흐르는 망에 종속된다. KT는 결국 망-네트워크 사업자다. 가상재화 사업자가 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네트워크 망과 저장장치를 갖춘 서버 - 스토리지 시설이다. 이미 KT와 SKT 등 통신사업자들이 가지고 있는 시설이다. 이것을 이용해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미래 사업이 바로 가상재화를 거래하는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KT는 막상 지금 그 가상재화를 만들어내고 발전시키는 콘텐츠 개발사, 그 콘텐츠를 하드웨어에 넣어 소비자에게 팔기 위해 애쓰는 사업자와 커다란 마찰을 빚고 있다. 


모바일에 새로운 메신저 개념을 만들어내고 게임을 유통시키면서 보이스톡으로 무료통화를 제공했던 카카오톡에 대해 KT는 어떻게 했던가? 다음의 마이피플이 제공한 음성통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했던가? 통화품질을 임의로 떨어뜨리거나 통화 자체를 차단했다. 이것은 망사업자가 당연히 지켜야 한다고 믿고 있던 망중립성에 대한 거센 논란을 일으켰다. 


가상재화


스마트TV를 개발하고 그 위에서 여러가지 매력적인 기능을 개발하고 있는 삼성전자와도 충돌을 빚고 있다. 스마트TV의 발전과 보급이 KT에게는 이익도 없이 트래픽만 늘게 해준다고 하면서 망이용을 차단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이것이 미래 가상재화를 거래하겠다는 사업자로서 소비자에게 어떻게 비춰질 지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즉 KT가 말하는 가상재화에는 중립성이란 없을 것이란 의미다.


KT의 가상재화는 결국 거래하는 사업자에게 유리한 것만 허용될 것이며, 그 과정에서 소비자의 이익은 고려대상이 아니다. 적어도 지금까지 KT의 행보를 본다면 확실하다. 철저하게 이익이 되는 콘텐츠만 허용하고 나머지는 차단하거나 제한할 것이다. 이런 자세로 미래를 개척하겠다고 선언하고 다른 사업자와 단결하겠다고 손을 내밀고 있다.


가상재화


과연 그 단결에는 어떤 명분이 있을까? 다함께 사업자의 이익만 추구하자는 의미 밖에 없다. 정작 그 가상재화를 가장 많이 사줄 소비자, 가치있는 가상재화를 만들어줄 생산자에 대한 배려나 정책은 없을 것이다. 이전에 KT는 휴대폰 기본요금을 1천원 내리면서 미래에 대한 꿈을 포기해야 할 지 모른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 KT가 꿈꾸는 가상재화는 적어도 내가 꿈꾸는 가상재화와는 성격이 많이 다를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