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역사를 배울 때 가장 뜨거운 화두가 된 것은 '만약에' 라는 가정이다. 역사에 가정(IF)은 없다는 것이 이 방면에서 가장 단호하게 내리는 상식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통쾌하게 여기거나 안타깝게 여기는 역사적 사건과 결단들은 모두가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니 일어났다는 맥락이다. 그러니까 새삼스럽게 가정을 덧붙이기 시작하면 논점이 빗나갈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런 금기를 어기면서도 때로는 가정을 즐긴다. 만일 고구려가 백제와 손을 잡고 삼국을 통일했다면?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지 않았다면?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너무 낮아서 케사르가 반하지 않았다면? 이런 것들은 재미있는 소재가 된다. 그래서 가상 역사 소설이라는 것도 나와있고 나 역시 이순신 장군이 살아서 선조의 밀명을 받고 일본을 정벌한다는 내용의 '일본정벌기'란 소설을 출간한 적이 있다.


얼마전에 헤럴드 경제의 기자에게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애플과 스티브 잡스에 대한 글을 쓰다가 전화했다는 기자는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애플이 만일 한국기업이라면 어땠을까요?' 라고 말이다.


사실 이 질문은 너무도 포괄적이다. 애플이 한국기업이라면 성공했을까? 애플이 한국기업이라면 칭찬받았을까? 애플이 한국기업이라면 재벌이 되었을까? 부터 시작해서 무수한 방면에서 접근하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금 과장하면 나폴레옹이 한국군인이라면 어땠을까? 하는 것과 맞먹을 지 모른다.


전화로 진행된 이 인터뷰에서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기자는 이른바 '경제민주화' 관점에서 애플이 한국기업이라면 어떻게 행동했을 지를 묻는 것 같았다. 그 답은 비교적 명확했다. 우선 관련 기사를 소개한다.(출처)



2011년 2월 미국,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실리콘밸리의 IT기업 주요 인사들을 만찬에 초대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스티브 잡스 당시 애플 CEO(최고경영자)에게 “(제조업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 미국에서 아이폰을 만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는 질문을 던졌다. 잡스는 그러나 “그런 일자리는 미국으로 되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잡스에게 거듭 미국 내 일자리를 늘려달라고 요청했지만 잡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2011 회계연도 애플이 생산한 스마트 기기는 1억6000만대. 애플의 스마트 기기는 여전히 단 한 대도 미국에서 제조되지 않고 있다. 


만약 애플이 한국 기업이었다면 어땠을까. 국내 기업들과 달리 이윤추구에만 역량을 총결집하는 ‘애플웨이’를 고집했다면 애플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애플은 네바다 주 리노에 작은 사무실을 차리고 소수의 직원만 두고 있다. 덕분에 애플은 캘리포니아 등 미국 20개 주에서 부과하는 세금 수백만달러를 피할 수 있다. 캘리포니아 주의 법인세율은 8.84%이지만 네바다 주의 법인세율은 0%다. 애플은 아일랜드와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제2의 리노’를 두고 합법적 세금 줄이기를 하고 있다.  


협력업체들 사이에서는 애플이 신제품을 출시할 때마다 기존 업체에 납품단가 인하를 요구한다는 불만이 제기되고 있다. 국내 한 부품업체 사장은 “애플이 0.004달러를 인하해 달라고까지 했다”며 “애플과의 가격협상은 일종의 전쟁”이라고 비유했다. 


특히 국내 부품업체의 경우 전체 매출에서 애플이 차지하는 비중이 60%에 달한다는 점에서 애플의 이 같은 납품단가 인하는 협력업체의 고사를 불러올 수 있다. 실제 애플 1차협력사의 경우 영업이익률이 2010년 4.7%, 2011년 4.9%에서 올 상반기 1.3%로 급감하기도 했다. 


애플이 한국 기업이었다면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다. 더욱 엄격한 동반성장지수에 납품단가연동제 도입 등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버텨내기 어려울 것이다. 


사회공헌도 마찬가지. ‘애플을 벗기다’의 저자 안병도 IT칼럼니스트는 “애플은 편리한 기기를 보급하는 것이 곧 사회공헌이라고 인식한다. 애플 법인명으로 낸 사회공헌기금은 극히 적다. 만약 똑같은 철학을 한국에서 적용했다면 가장 인색한 기업으로 낙인찍혔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 기사는 애플이 가진 기업성격에 대해서 비교적 선명하게 한쪽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내가 한 말을 인용하고 있다. 실제로 내가 기자와 한 말은 훨씬 길고 구체적이었지만 그걸 전부 실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말해두건대 나는 애플과 스티브 잡스에 대해서 빛과 그림자가 전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래서 이날 인터뷰의 주요내용을 소개한다.


애플이 한국기업이라면 어떤 평가를 받을까?


1. 애플은 지극히 목적지향적 기업이다. 그들은 새로운 기술과 편리함을 지닌 컴퓨터를 만들겠다는 목적에 최적화되어 있다. 애플은 미국법을 최대한 지키려고 노력한다. 애플은 미국에서 탈세나 각종 불법행위를 저지른 적이 거의 없다. 그런 것을 어겨서 회사문을 닫게 되는 것은 목적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2. 반대로 신제품을 만들기 위해 자잘한 소비자와의 약속을 무시하기도 한다. 물론 민사소송에서 나중에 거액의 벌금을 내게 된다. 또한 합법적 다국적 절세 같은 것은 서슴없이 한다. 애플 주주의 이익을 올려주는 행위는 회사를 성장시켜 목적달성을 쉽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의 윤리적 비난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3.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과연 고용과 노동에 관심이 있었을까? 애플시절은 아니지만 그는 한때 로스 페로와 함께 넥스트 컴퓨터를 차리고는 일본과 아시아의 저가노동력에 대항했다. 미국땅에 세운 최첨단 로봇공장은 미국 노동자에게 최고의 근로조건을 제공하면서 넥스트 컴퓨터를 생산했다. 그러나 판매량은 부진했으며 조사결과 이 공장의 생산성은 당시 일본을 비롯한 어느 아시아 공장보다 훨씬 떨어졌다. 그 이후 잡스는 미국에 공장을 운영하지 않았다.



4. 애플은 환경에 관심이 있었을까? 얼마전 애플은 환경친화 인증기준을 자의로 탈퇴했다. 제품 판매에 그다지 영향이 없으리라는 판단이었다. 환경보호주의자의 비난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나 캘리포니아주를 비롯해 애플의 주요 교육시장에서 부정적인 신호가 오자 며칠만에 인증기준에 복귀했다. 유럽과 독일의 환경기준에서 애플의 일체형 배터리가 계속 지적되지만 애플은 제품의 미려함과 편리함을 주는 일체형을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 하다.


5. 잡스 체제하에서 애플은 회사차원의 사회적 공헌과 기부에 인색했다. 이미 혁신으로 충분한 칭송과 세계인에게 공헌하고 있다는 자부심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팀쿡 체제하에서는 점점 미국의 평범한 기업 수준까지는 도달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정리해보자. 애플이 한국기업이라면? 아마도 현재 한국의 대표적인 게임회사인 NC와 넥슨이 받는 정도의 사회적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이 두 회사는 IT성공의 대명사이고 직원의 처우도 좋은 편이다. 하지만 회사규모에 비해 운영하는 프로 스포츠팀도 거의 없고 사회적 공헌도 그다지 활발하지 않다. 그래서 게임산업이 공격당할 때 사회적으로 여론에 보호받지 못하는 면을 안고 있다.




역사에 가정이 없음에도 애플이 한국회사였다면? 이라는 상상을 하는 것을 그 나름대로 교훈을 준다. 농담삼아 한마디 덧붙여보자. 애플이 한국회사라면 나는 보다 일찍 매킨토시와 아이폰을 샀을 것이다. 더 싸고 한국인에게 좋은 제품이 되었을테니까. 하지만 스티브 잡스 밑에서 일하라면? 그건 사양하고 싶다. 그는 단지 멀리서 쳐다보고 존경하면 딱 좋은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