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릴 적,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에는 전자시계나 전자계산기도 비싸고 귀한 물건이었다. 동네마다 있는 주산학원에서 쉴새 없이 주판 튕기는 소리가 나고, 전자시계 하나 좋은 걸 사게 되면 주위에서 부러움의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어느새 시대는 발달해서 전자계산기는 동네 장난감 가게에서 싸구려 물건으로 한 개에 만원도 하지 않게 되었다. 요즘에는 전자시계나 계산기는 한 개에 몇 천원 주고도 구할 수 있는 저가품도 나와있다.



전자잉크를 탑재한 전자책 단말기가 처음 등장했을 때는 엄청난 고가품이었다. 디지털 기기가 다 그렇지만 특히 전자책은 그 원조가 되는 종이책이 대략 만원 안팎으로 한권을 살 수 있는데 비해서 수십만원을 넘는 가격으로 인해 부담이 되었다. 물론 전자책 단말기는 한번 사면 수백권을 읽는데 쓸 수 있으니 차원이 다르지만 초기 비용이 너무 비쌌던 것이다.

하지만 아마존이 저가형 단말기를 만들고, 아이패드가 태블릿을 통해 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킨들 파이어와 넥서스7까지 나오면서 고급 태블릿조차 20만원 남짓으로 가격이 내려가게 되었다. 여기에 킨들이 10만원 이하로 가격을 떨어뜨린 버전까지 내놓자 점차 가격인하의 끝을 향해 달리게 되었다.

그래도 최소한 전자제품이니까 종이책보다야 비싸겠지. 라는 건 상식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예상을 깨뜨리는 엄청난 제품이 나와버렸다.  인가젯에 실린 독일의 한 전자책 단말기 제품이다. (출처)





독일의 Txtr는 $13짜리 초저가형 E-book 리더기 ‘Txtr Beagle’을 발표했다.

이 제품은 5인치 800×600 E-Ink를 탑재한 제품으로, ‘Read only’ 라는 컨셉으로 책 읽기 이외에 모든 기능을 제거했다. 4GB 내장메모리는 더 이상 확장이 안되며 책읽기 이외에 다른 기능은 제공하지 않는다. 기기를 외부와 연결할 수 있는 단자가 전혀 없는데, 책은 블루투스를 이용해서 다른 스마트폰에서 받아오며(PDF, epub 등 지원) 전원은 AAA 배터리 2개를 이용한다. 무게는 128g(건전지 포함)이며 사이즈는 140 x 105 x 4.8~14mm 이다.

이 제품의 가장 큰 특징은 가격으로, €10(약 $13)의 판매가이다. 이를 위해 단독으로 판매되는 제품이 아니라, 스마트폰의 악세서리 개념으로 판매를 위해 통신사들과 협상 중이다. 이 제품은 연말 이전 출시될 예정이다.


비록 해상도나 여러 기능에서 떨어지는 제품이긴 하지만 가격을 보라. 무려 13달러다. 2만원이 안되는 가격이다. 보통 약간 두툼한 전문서적의 가격이 2만원을 넘는다는 걸 상기하면 종이책 가격보다 싼 전자책 단말기인 셈이다. 이런 가격에 제품이 나올 수 있다는 자체가 경이롭기까지 하다.



책보다 싼 전자책 단말기, 새로운 시대를 열까?


독일에서 만든 이 제품 자체의 판매는 그렇게 대단할 것 같지 않다. 브랜드는 생소하고, 단말기 외에 다른 콘텐츠나 활용에 대한 준비는 되어있지 않다. 다소 실험적인 상품이며 마케팅도 그리 활발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커다란 것은 가능성이다. 이렇게 싸게 전자책단말기를 만들어 팔아도 손해는 보지 않는다는 가능성을 증명해보인 데 커다란 의미가 있다.

전자책은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가장 보급에 장애가 되는 것이 다소 비싼 단말기 가격이었다. 초기 구입비가 종이책보다 현저히 비싸기에 일반인들이 사기 조심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종이책에 비해 가격이 차이가 없거나 더 싸게 되면 인식이 달라진다. 급속히 전자책으로 시장전환이 이루어질 수 있다.



애플은 아이패드를 통해 품위있고 고급스러운 전자책 단말기를 제공하길 원한다. 아마존은 하드웨어인 단말기에서 이윤이 거의 없더라도 일단 보급시키고는 전자책 콘텐츠를 통해 충분한 이윤을 보길 원한다. 그래도 아마존조차도 최고한의 고급스러움은 유지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위의 제품같은 가격대의 제품은 그 모든 업체들의 이익 구조를 대부분 파괴할 수 있다. 고품위 전자책을 비싸게 읽으려는 소수의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잠재적인 소비자들을 종이책과 동등하거나 더 낮은 가격으로 전자책을 읽을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기존업체들은 전자책을 다소 고급스럽고 미래지향적인 기능위주의 시장으로  이끌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마치 게임조럼 화려하고도 고급스러운 고부가가치의 책으로 말이다.



그런데 종이책보다 싼 전자책이 나와서 단지 읽을 수 있는 기능에 특화한 초저가 시장을 먼저 만들어버리면 시장의 패러다임이 다시 바뀔 수 있다. 자칫하면 아이패드도 킨들도 모두 패배자가 된 상태로 초저가 단말기와 아이북수, 아마존의 직거래 시장으로 재편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문제는 결국 소비자의 선택이다. 초저가 전자책이 주는 부담없는 읽기 기능을 중시할 것인가, 아니면 돈을 더 주더라도 보다 고급스러운 기능을 제공하는 책을 원할 것인가? 이것이 앞으로의 시장을 이끌어가는 매우 중요한 선택과정이 될 것이다.


(원문참조:  한겨레 오피니언 훅 - 안병도의 IT뒤집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