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RPG를 예로 들어보자. 용사가 갖은 고생을 해가며 레벨을 올리고 장비를 갖추며 동료를 얻는다. 그리고는 최강이라 일컬어진 보스를 쓰러뜨린다. "만세! 드디어 세상에 평화가 찾아왔다!" 그런데 그 보스가 쓰러지자마자 뒤에 지키고 선 진짜 보스가 나타나서 말한다. "내 부하 중에서 가장 약한 놈을 쓰러뜨렸구나. 넌 아직 멀었다!" 이렇게 되면 용사는 어이가 없어 그 자리에 주저앉을까? 아니면 더욱 용기를 내서 진짜 보스에 도전할까?



순전히 애플 입장에서만 보자면 안드로이드 진영이 딱 그 모습일 것이다. "야! 이 짝퉁들아! 그만 나오지 못해!" 라고 소리치며 좌충우돌 법정 고소를 연발하며 하나씩 차분히 승소를 쌓아갔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 가운데 가장 강한 보스라고 불렸던 삼성을 미국 평결로 쓰러뜨렸다. 하지만 삼성은 진짜 보스가 아니라는 듯이 바로 그 뒤에 있는 구글이 성명서를 발표했다.(출처)

애플-삼성 재판에서 배심이 애플 특허들 침해로 삼성에게 10억4,900만 달러를 배상하라는 평결이 나온 후, 구글은 오늘 이에 대한 공식 성명을 내놓았다. 그 공식 성명은 아래와 같다.
 
항소법원이 특허 주장들의 침해와 유효성을 재조사할 것이다. 이 주장들의 대부분은 코어 안드로이드 OS와 관련이 없고, 수개 (애플 특허들)가 미 특허청에 의해 재심사되고 있다. 모바일 업계는 빠르게 움직이고 있고, 모든 업체들 -- 새 업체들을 포함해 -- 이 수십년 동안 궁리한 아이디어들을 쌓고 있다. 우리는 소비자들에게 혁신과 가격이 알맞은 제품들을 제공하기 위해 파트너들과 함께 일하고 있고, 이를 제한하는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다.


삼성이든 소니든 모토로라든 마찬가지다. 모두가 안드로이드란 운영체제가 없으면 스마트폰 세계에서 아이폰에 감히 대적도 하지 못했을 회사들이다. 그렇지만 구글은 애플 입장에서 마치 어둠의 마왕처럼 웅크리고 앉아서 세상에 나와서는 안될 재앙의 씨앗-안드로이드를 무료로 뿌리고 있다. 해리포터로 비유하자면 볼드모트이고 반지전쟁으로 비유하자면 사우론이다.

위의 말은 잘못 해석하기 쉽다. 일부 기사에서는 구글이 삼성의 패소에 놀라 당황한 나머지 발을 빼는 성명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특허침해된 기능은 안드로이드와 관련이 적고, 구글은 원칙적으로 소비자만 보고갈 뿐 특별히 이익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원칙만 천명하면서 물러선다는 뜻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다른 의미다.



구글이 발표한 성명을 아주 쉽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애플이 베꼈다고 주장한 운영체제 기능들은 안드로이드 안에서도 제거해도 상관없는 하찮은 기능에 불과하다.
2. 이번재판에서 애플이 자기 것이라고 인정받은 기능들도 미국 특허청에 의해 과연 유효한 특허인지 재심사되고 있다.
3. 항소법원에서 어차피 다시 애플특허를 침해했는지 재조사할 것이다.
4. 진짜 보스는 나다. 애플은 최종적으로는 나와 싸워야 할 것이다.

마지막 항목은 위 성명서가 나오게 된 궁극적인 이유다. 구글은 비록 안드로이드를 무료로 배포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 운영체제의 아버지이며, 그로 인해 이익을 얻고 있다. 따라서 도의적으로 협력사를 보호해줘야 한다. 


만일 여기서 구글이 상관없는 일이라고 발을 뺀다면 안드로이드 협력사들은 크게 동요할 것이며 지배력이 약화될 것은 뻔하다. 따라서 뒤에서 힘을 실어줘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 예전에 대만의 HTC가 애플에 제소당했을 때 구글은 자기가 가진 특허를 일부 임대까지 해주며 애플에 대항시키는 힘을 준 적이 있다.

삼성의 패소를 맞은 구글의 쿨한 대응?

이전부터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예상은 화해였다. 삼성과 애플의 법정다툼은 결국 화해와 크로스라이센스로 가게 될 거란 뜻이다. 하지만 그런 화해도 양측이 어떤 포지션에서 맺느냐에 따라 천지차이다. 쉽게 말해서 불평등조약에 가까운 화해도 분명 화해이기는 하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안드로이드 제작사에 소송을 걸어 라이센스비를 뜯어내는 화해를 맺고도 함께 손을 맞잡고는 '우린 둘다 이겼습니다!' 라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삼성도 어쩌면 그런 화해같지도 않는 화해를 해야될 처지까지 내몰릴 수 있다.

구글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애플과 구글이 사생결단을 하고 싸워서 승부를 낼 일은 없다. 애플은 구글 자체가 아닌 단말기 제조회사들을 우선적으로 제거하고 있다. 반대로 구글은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마치 냉전시대 미국이나 소련처럼 뒤에서 무기와 자금을 대주며 지원한다. 구글 입장에서 삼성이란 최고의 파트너를 잃게 되면 절대반지를 잃은 사우론보다 상황이 심각해진다. 따라서 허둥거려서는 안된다. 구글은 위의 성명서처럼 쿨하고 단호한 대응을 내놓았다.


한달뒤에 나올 판결, 그리고 1년 이상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최종심사를 앞두고 구글은 삼성에 더욱 힘을 실어줄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이 싸움은 애플과 안드로이드 진영 사이에 누가 주도적인 점유율을 가지느냐를 결정하는 싸움이다. 구글도 물러설 수 없고 애플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보니 이런 대리전의 구도는 어디선가 많이 본 듯 싶다.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놓고 싸운 어떤 전쟁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