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출간 (자음과모음)

저연령층도 쉽게 읽을 수 있는 동화적 판타지를 지향한 작품.


환상소설
                         환 이야기
                                       안병도 2003


          제 1 장  토끼가 전해준 입학통지서

                           - 1 -
별이 반짝이고 사람들이 모두 잠에 빠져든 깊은 밤. 환하게 비치고 있는 보름달 안에서 하얀 색 토끼 한마리가 나타난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토끼는 벌써 수백 년 동안-물론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그런 식으로 지상에 내려왔기 때문이다.
달에서 내려온 그 토끼가 빨간 비단조끼를 입고 작은 깃털날개가 달린 가죽신발을 신고는 두발로 걸으며 인간의 말을 중얼거리고 있어도 역시 놀라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현명한 사람이면 모두 짐작할 수 있듯이 이 토끼는 보통 토끼가 아니기 때문이다.
“큰일이야! 이러다 늦겠어!”
토끼는 날개신발을 이용해 마치 땅위를 걷는 것처럼 하늘 위를 걸었다. 짧은 토끼의 뒷발을 이용해 걷는 그 모습은 차라리 깡총깡총 뛰어 다닌다고 해야 적당한 표현일 것이다.
그는 짙은 어둠과 옅은 새벽의 장막이 섞여있는 도시 위를 걸었다. 토끼의 발밑으로 보이는 도시는 형형색색의 전등이 켜져 있어 꼭 크리스마스트리 같았다.
“무슨 일이에요?”
토끼의 조끼 주머니에서 보라색 잎을 가진 꽃이 살짝 꽃잎을 내밀며 물었다.
“급한 일이 있어. 그것도 매우 드믄 일에다가 놀라운 일이지.”
“어떤 일이 이나바의 흰토끼를 이렇게 급하게 만든 거죠?”
“꽃잎을 너무 많이 내밀지마. 나는 지금 달려가고 있어. 잘못하면 떨어진다고, 나르시스.”
“걱정 말아요. 지금 가지를 한껏 뻗어서 주머니를 꽉 잡고 있으니까요, 토끼씨.”
“이름을 불러줘. 그렇게 부르면 어째 보통 토끼와 구별이 안가잖아?”
“구별이 안가긴요. 원한다면 이나바가 아주 먼 옛날에 악어를 속여 강을 건넜다가 속임수가 들통 나 통째로 가죽이 벗겨졌다든가, 그걸 치료하려고 신에게 치료법을 묻다가 더 큰 봉변을 당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면 이나바가 화를 낼 테니 그만두죠. 우선 밝혀둘 점은 당신이 매우 영리한 토끼이며 마법에 능하다는 점이에요. 넓고 신비한 달세계에서도 하나 밖에 없는 토끼죠.”
나르시스라고 불린 보라색 꽃이 대단치 않은 듯 대답했다. 나르시스는 토끼를 이나바라고 불렀다. 이나바의 흰토끼가 본래 이름이고 이나바는 그 줄임말이었다.
“조끼주머니에 들어가서 말을 하는 꽃도 하나 밖에 없지. 그리고 그 꽃이 매우 현명한 현자이며 매력적인 여성이라는 점도 중요해.”
칭찬에 한껏 기분이 좋아진 이나바는 나르시스를 추켜올렸다.
“그럼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죠. 무슨 일이죠?”
“우리의 존경하는 지도자이며 명예로운 룬 마법학교의 교장인 미카엘의 지시를 받고 한 소년에게 입학통지서를 전달하러 가는 길이야.”
“룬 마법학교의 입학통지서라고요?”
나르시스의 꽃잎이 잠시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매우 놀랐을 때 보이는 행동이었다.
“내가 알기로 지상세계 사람에게는 마법학교의 입학이 허용되지 않아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그러니까 놀라운 일이라고 했지. 아! 지상이 가까워졌군. 보이지 않는 마법을 거는 걸 잊었어.”
이나바가 귀를 쫑긋 세우며 입 속으로 나직이 마법주문 하나를 외웠다. 그의 몸이 연기처럼 하얗게 변하며 곧 전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마법 쓰는 모습을 지상세계에 보여선 안 되니까.”
“달세계와 룬 마법학교의 오래되고 엄격한 규칙이죠. 지상세계 사람의 입학을 허용하지 않는 것도 그런 규칙의 하나에요. 지난 수십년, 아니 수백년 전까지 더듬어 보더라도 그런 예는 없었으니까요. 달세계가 인간이 갈 수 없는 닫힌 곳이듯, 룬 마법학교는 오로지 달세계 사람들에게만 열려있어요.”
“나 역시 이해할 수 없어. 하지만 미카엘의 생각이 워낙 확고해. 룬 마법학교의 규칙을 만들고 그걸 집행해 온 것은 바로 미카엘이야. 그가 그렇게 정했다면 분명 뭔가 깊은 생각이 있어서 하는 행동일 거야.”
“그렇다면 그런 행운을 얻은 소년이 누군지 궁금한데요?”
“나 역시 궁금해. 하지만 조금만 기다려. 곧 보게 될 테니까.”
“오래 보지는 못하겠죠?”
“내 임무는 오직 그에게 이 통지서를 전달해주고 마법학교로 오는 방법을 일러주는 것뿐이야. 길게 이야기하지야 못하겠지.”
보라색 꽃과 대화하는 가죽조끼를 입은 토끼가 빽빽이 들어선 건물들 사이를 뚫고 하늘을 뛰는 광경을 사람들이 보지 못한 건 다행일지 모른다. 아니라면 사람들은 일제히 위험경보, 화재경보를 비롯해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경보와 신고를 주고받으며 대혼란에 빠졌을 테니까. 사람의 눈에 전혀 보이지 않게 된 이나바와 나르시스는 그렇게 몇 마디씩을 교환하며 천천히 그들이 목표로 하는 집에 접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