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IT에 관심을 가지고 메모리, 특히 램에 대해 공부할 때 흥미있게 들었던 말이 있다. '국제 메모리 시장은 불황과 호황을 2-3년 주기로 반복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메모리 가격도 폭등과 폭락을 반복하는 구조다.' 라는 말이었다.



어째서 이런 말이 나오게 된 걸까? 사실 이것은 어떤 과학법칙 같은 게 아니다. 메모리는 공장에서 모래와 금속 약간을 가지고 찍어내는 공산품에 불과하다. 숨바꼭질하듯이 언제는 많이 나왔다가 언제는 적게 나오는 그런 물건이 아니다. 하물며 이런 특성을 지닌 산물은 자연계에는 없다.

이건 지극히 사회적인 법칙이다. 그것도 매우 잔인한 경쟁구조를 내포하고 있으니 바로 흔히 말하는 '치킨게임' 의 법칙이다.

메모리 반도체는 미국에서 먼저 개발되었다. 따라서 미국업체가 선두주자였다가 80년대에 일본업체가 그 주도권을 넘겨받았다. 이때까지는 가격변동이 그렇게 심한 물건이 아니었다. 문제는 여기에 한국이 도전하면서 시작되었다.

일본업체는 삼성을 비롯한 후발업체를 견제하기 위해 잔인한 수단을 썼다. 예를 들어 삼성이 64K D램 개발에 성공하기 전까지는 같은 메모리를 높은 가격에 팔았다. 그러다 삼성이 개발과 양산에 성공해서 돈을 벌고자 하면 시장가의 반도 안되는 가격으로 낮췄다. 그러면 삼성은 개발비조차도 뽑지 못하고 역시 비슷한 가격에 팔아야 했다. 선두에 있던 일본 업체들은 그런 방법으로 후발업체인 삼성을 경영난에 빠뜨려 탈락시키려는 것이었다.



이런 방법은 일본업체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모든 견제를 뚫고 선두업체가 된 삼성은 이번에는 뒤에서 따라오는 일본과 대만, 유럽 업체에 대해서 같은 방법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어차피 메모리 시장은 가격과 용량 외에 품질은 대동소이하다보니 다른 차별성이 없다. 그러다보니 모두 상대가 망할 때까지 밑지고 파는 적자경쟁에 돌입한다. 이것이 바로 흔히 말하는 '치킨게임'이다.

여기서 견디지 못한 대만업체가 작년에 파산했다. 일본업체는 개별 기업이 차례로 망하고 나서 하나로 뭉쳐서는 정부의 공적자금을 받아 엘피다로 거듭났다. 그런데 그 엘피다마저도 결국 손을 들어버렸다. (출처)


메모리 가격이 폭등하고 있다. 일본의 반도체 업체 엘피다가 파산신청을 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정확히 이틀만에 주요 D램 모듈 가격이 최대 40%까지 오른 것.

가격비교사이트 다나와의 최저가를 기준으로 봤을 때 '삼성전자 DDR3 4G PC3-10600'은 하루 전인 28일과 비교해 3천원이 오른 2만 4000원에 판매되고 있다. 지난 월요일과 비교하면 4~5천원이 오른 것이다.

인기 제품인 '삼성전자 DDR3 2G PC3-10600'의 가격도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28일에 비해 약 10% 가량 오른 1만 3000원에 판매되고 있으며, 이 제품 역시 이틀 전과 비교하면 2~3천원 가량 올랐다.

많이 판매되고 있는 '삼성전자 DDR3 4G PC3-12800'의 경우 상황이 더 심각하다. 하루만에 9천500원이나 급등했다. 약 40%가 폭등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처럼 D램 모듈의 가격이 빠르게 오르고 있는 현상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엘피다의 파산신청 소식이 가격 변동에 영향을 미칠 소지가 있다고는 하지만 국제 D램 시세에 비해 국내 메모리의 가격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치킨게임이 한창일 동안에 소비자는 좋다. 메모리 가격이 너무 싸기에 쉽게 많은 용량을 손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업체도 속으로는 골병이 들어도 차마 값을 올릴 수 없다. 어느 한 업체가 쓰러져 생산이 줄어야 그나마 나머지 업체가 산다.



엘피다 파산과 메모리 폭등, 씁쓸한 이유는?

문제는 이런 치킨게임이 끝나는 순간이다. 과당경쟁에 의한 적자판매가 영원히 지속될 리는 없다. 결국 누군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살아남은 자는 승자가 된다. 그러면 승자가 차지할 과실은 어디서 마련할까? 바로 이때부터 소비자의 피해가 시작된다. 적자를 메우기 위해 이번에는 적정이윤을 넘어서는 마진이 메모리에 붙으면서 폭등이 시작되는 것이다. 위의 뉴스는 결국 그 시작을 알리는 조짐이다.

소비자를 위한 좋은 시장은 각 업체가 적당히 항상 서로를 견제하며 살아남아주는 것이다. 너무 많은 이윤을 보는 폭리도 좋지 않지만 모두가 심하게 적자를 보는 현상도 반갑지 않다. 소비자는 승자를 위한 트로피나 노획물이 아니다. 그런데 치킨게임은 소비자를 보고 하는 게임이 아니다. 상대업체만 죽이고 나면 결국 소비자는 따라올 수 밖에 없다는 원리의 게임이다.

게다가 한국 시장은 지금 투명하지 못하고 왜곡된 유통구조를 가지고 있다. 일본지진 영향이라며 쓸데없이 폭등했던 카메라와 렌즈가격도 그렇고, 태국홍수라며 아직도 두배가 오른 하드디스크도 그렇다. 마치 정유사의 핑계처럼 한국의 요즘 유통구조는 핑계만 기다리는 악덕보따리상과 다를 바 없다. 그들은 이제 메모리값을 올릴 핑계를 잡았다. 



치킨게임이 끝나고 이제 이긴 자의 상품이 되어버린 소비자에게는 어떤 길이 기다리고 있을까? 엘피다의 파산뉴스가 들리자마자 마치 주식시장처럼 바로 값이 뛰는 현장 메모리 가격을 보며 내가 느낀 씁쓸함이다. 요즘은 세상이 돈 앞에서 너무도 야만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