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책이 한국에서 선풍적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촌스러운(?) 제목인데 이런 책이 한국에서 호응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마도 이 책이 미국에서 쓰여진 책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을 것이다. 같은 제목과 내용이라도 한국사람이 쓴 책이라면 조롱이나 무시만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전쟁을 겪고 고도성장과 사회의 급변을 체험한 탓일까. 한국사회에서 ‘정의’를 입에 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올바르게 살자라든가 정의를 구현하자고 하면 ‘너나 잘하세요.’ 내지는 ‘그래, 너 잘났다.’는 비웃음이 돌아온다. 심지어 가장 패기만만해야할 20대 대학생들도 정의를 논하는 대신 ‘나만 아니면 된다.’ 라든가 ‘정의가 밥 먹여주냐?’ 라는 생각을 한다. 한국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정의’가 아니라 ‘이익’이다. 즉, 나에게 이익을 주지 않는 정의 따위는 언제든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블로그 세계로 와 보자. 어차피 한국 사회는 어디든 비슷한 특질을 지닌다. 그 세계의 권력과 그 권력을 둘러싼 치열한 다툼이 있을 뿐이다. 춤판이든, 온라인 게임 세계든 동일하다. 다만 지금 내가 몸담고 있는 곳이 블로그 세계이니 이것을 말해보자는 의미다.

파워블로거. 이 말을 둘러싼 근래의 논란은 이런 한국 사회의 특질을 아주 잘 말해준다.


본래는 단지 블로거였을 뿐인 어떤 집단이 진솔하고 성실한 노력으로 대중의 지지와 신뢰를 얻기 시작했다. 이것은 다분히 기존 매스미디어에 대한 불신과 반발의 산물이다. 매스미디어의 기자는 엘리트의식으로 무장하고는 독자들과 눈높이를 같이 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또한 권력과 돈에 저항해서 진실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영합해서 이익을 취해려는 행동을 더 많이 했다. 이에 비해 블로거는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독자의 질문에도 댓글로 소통하는 등 더 친근감을 주었다. 

결국 인터넷이란 매체를 타고 대중의 신뢰가 일정부분 블로거에게 넘어왔다. 그 결과로 특정 전문영역에서 언론의 말보다 오히려 블로거의 정보와 의견을 더 신뢰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 결과로 해당 블로거를 우리는 ‘파워블로거’ 라 부르게 되었다. 여기서 ‘파워’는 영미권에서 종종 ‘권력’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파워블로거란 권력을 가진 블로거란 의미가 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다. 파워블로거가 가진 그 권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모택동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라고 했지만 그건 혁명을 통한 권력쟁취를 모토로 삼는 공산주의 권력의 특징일 뿐이다. 현대에 있어 다수를 차지한 나라의 권력은 대부분 투표결과에서 나오고 그 투표를 가르는 것은 대중이 누구를 신뢰하고 선택하는가 이다. 파워블로거의 권력이란 것도 결국 믿어주는 네티즌의 힘에 나온다고 봐야한다.

하지만 문제는 파워블로거 역시 인간이라는 점이다. 인간은 자기가 가진 권력이 강해지면 그게 온전히 자기만의 것이라 착각한다. 국회의원이나 시도지사 , 대통령이 선거때 말로는 ‘국민의 종복’이라 몸을 낮추지만 당선만 되고나면 오히려 ‘국민이 종복‘ 인 것처럼 행동한다. 파워블로거들 역시 댓글로는 ‘여러분들의 추천과 지지가 저를 만듭니다.’ 라고 하지만 실상은 ‘내가 글 잘쓰고 잘나서 성공한 거지.‘ 라고 행동하기 쉽다.

근래에 베비로즈 사건을 비롯해 파워블로거의 윤리성 문제가 떠오른 것도 그 때문이다. 기자와 주류 언론도 똑같다느니 말해봐야 구차하다. 왜냐하면 그건 정치인들이 흔히 ‘관행’이라고 하며 정치자금을 챙기거나 탈세를 일삼는 짓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세상이 다 썩었는데 왜 나만 가지고 그래?‘ 라고 하면서 자기도 썩었다고 말하는 게 자랑스러운가? 관행을 내세우면서 이해를 바라기전에 스스로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하는 건 당연하다. 

한국 파워블로거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일까? 그건 스스로가 가진 힘을 알면서도 그에 따른 책임과 의무를 지지 않으려는 데 있다. 영화 스파이더맨에서 ‘강한 힘에는 강한 책임이 따른다.’ 고 했다. 이게 바로 정의가 무엇인가를 말하는 미국의 힘이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그 말은 통용된다.


파워블로거는 분명 힘이 있다. 독자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파워블로거의 말은 일개 네티즌이나 인기없는 블로거의 말과는 그 영향력이 다르다. 그러기에 마케팅회사가 돈을 주고 의뢰를 하며, 기업들이 함께 일을 하는 것이다. 당사자도 자기가 이런 권력이 있기에 일반 블로거와 다르다는 건 분명히 알고 있다.

어디가서 ‘파워블로거’ 라고 말하며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경우도 많다. 당연하게도 그 신뢰를 이용한 마케팅으로 경제적인 수익도 챙기려 하며, 명예도 얻고 싶어한다. 그것을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막상 이런 권리에 대해 누군가 책임이나 의무를 지우려하면 이들은 대부분 돌변한다. 자기는 그저 ‘블로거’ 일 뿐이라든가 그저 ‘개인’ 일 뿐이라 회피한다. 이게 말이 될까? 권리를 얻으려할 때는 ‘파워블로거’인데 의무를 해야할 때는 ‘블로거’이거나 ‘네티즌’이라는 이중잣대 말이다. 이건 정의야 어떻게 되었든 간에 내 이익만 중요하다는 한국 사회의 병폐가 블로거 스피어에도 연장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파워블로거란 무엇인가?

위에서 예를 들었듯 어차피 지금 한국 사회에서 진정으로 정의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실천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물며 그게 어떤 커다란 흐름이 된다는 건 바라기도 힘들다. 그러기에 내가 이 시점에서 파워블로거가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고 해봐야 비웃음과 조롱만 내뱉을 게 뻔하다. 이익없는 정의와 책임 따위는 아무도 지키려고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진정한 파워블로거란 자기가 가진 힘이 대중의 신뢰에서 온 것임을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신뢰를 배신하지 않기 위해 책임과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사람이다. 물론 사람은 실수도 할 수 있다. 또한 이익추구도 할 수 있다. 파워블로거라고 해서 무슨 성직자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실수를 했을 때는 회피하지 말고 당당히 파워블로거에 걸맞는 만큼의 책임을 져라. 이익추구를 할 때는 그에 합당한 의무도 져라. 제발 유리할 때와 불리할 때 이익에 따라 자기 정체성을 바꾸지 마라. 앞으로 유리하면 ‘파워블로거’ 내지 ‘프로블로거’ 고, 불리해지면 ‘그저 블로거’ , 내지 ‘한 개인’ 이라는 트랜스포머 수준의 변신은 그만 봤으면 한다.

그게 싫다면 차라리 블로거를 외부에 공개하지 말고 폐쇄형으로 만들어 혼자 일기를 쓰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아니면 일체의 정치적, 상업적 행위를 하지 않는 방법도 있다. 그러면 권리가 없어지는 대신 아무도 책임이나 의무를 지우지 않을 것이다. 각자 생각은 다르겠지만 적어도 권리와 책임에 관해서 지구상 어떤 나라도 권리만 주고 책임을 주지 않는 나라는 없다. 책임을 지기 싫어서 파워블로거를 어떤 다른 명칭으로 바꾼다고 해봐야 본질은 마찬가지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파워블로거란 명칭 자체가 어색하고 버겁다고 느끼지만 굳이 이 명칭을 회피할 생각은 없다. 이 명칭이 나에게 조금의 힘이라도 준다면, 반대로 그만큼의 책임과 의무를 수행할 각오가 되어있다. 그리고 만일 그런 각오가 없어지는 순간이 온다면 주저없이 블로그 자체를 그만둘 생각이다.

그래야 정의가 무엇인가를 묻는 어떤 나라에 비해 조금이라도 우리가 덜 창피해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한국 블로거 세계에서도 다투어 진정한 파워블로거란 무엇인가를 묻고 고민하는 그런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