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역사라는 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보통 물건이 오래되면 낡았다 라고 말한다. 낡은 것이 오래되었다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능이 떨어지며 내구성이 감소되었다는 기술적 의미를 지닌다.
낡은 것은 결국 교체하거나 새로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현대화라는 것이며 우리의 문명이다. 그러나 오래되었다는 것에는 또다른 의미가 있다. 바로 그 물건에 여러가지 스토리가 생긴다는 뜻이다.

 


문화재라는 건 이 가운데 많은 사람이 인정하는 각별한 스토리가 붙은 물건이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우리가 쓰고 입고 경험하는 모든 것은 문화재가 될 자격이 있다. 내가 가본 안동의 고택 역시 처음에는 하나의 집이었고 그곳이 오랜 역사속에 스토리를 갖추게 되면서 문화재로서의 고택이 된 것이다.




고택에서 듣는 성씨 이야기는 그래서 더욱 재미있고 진지한 것인지 모른다. 지금으로부터 수백년 전에 지어진 건물에는 많은 사람들의 숨결이 깃들어있다. 그 안에서 나 역시 하나의 숨결을 남기며 서 있다.




한국은 특히 조상에 대해 진지하다. 뼈대있는 집안의 후손이니, 옛 조상 가운데 어떤 유명한 분이 있었느니 하는 게 마치 자기 스스로의 신분처럼 강조되기도 한다. 하긴 내 옛조상은 마당 쓸던 노비였습니다. 하면 뭐 그리 자랑스러울 수는 없다.



고택 대청마루에서 흰 옷을 입고 의관을 정제한 어르신께서 하나씩 일러주는 성씨의 유래와 조상의 이야기가 펼쳐졌다. 아직은 추운 날씨지만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고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에 자뭇 나도 경건해졌다.



자네는 조상이 삼 대에 걸쳐 정승을 지낸 몸일세. 그만큼 유래있는 집안인 셈이지...

임경업 장군이 바로 자네의 조상이야. 그만큼 기개있는 양반의 후손인 것이지...




아무래도 이런 말을 들으면 누구든 경건해질 수 밖에 없다. 수백년 혹은 수천년의 조상이 있기에 오늘날 내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단순히 생명체로서 번식하는 것만이 아니라 혈통을 잇고 이념을 잇고 행동양식을 잇는 행동이 된다면 말이다. 과거가 현재를 규정하고 미래를 지배하는 것이다.




자네의 조상 가운데는 안향이란 분이 있네. 우리나라에 처음 유학을 들여오신 분이지. 그 후로 고려시대에 대 유학자를 많이 배출했네...


내 이름이 호명되었을 때 경건히 무릎을 꿇고 듣는 나에게 성씨의 사연이 들렸다. 모르던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추운 날씨에도 꼿꼿한 자세로 대청마루에서 정성껏 일러주시는 어르신의 모습과 주변을 채우는 고택의 모습은 다른 때와 다른 진지함을 주었다. 이것이 바로 문화재가 가진 스토리의 힘이었다.




역사속 성씨이야기는 끝으로 가훈 하나씩을 선물했다. 나에게는 입사필성 뜻을 세우면 최선을 다하라. 라는 가훈이 주어졌다. 나름 성실한 성격의 나에게 딱 맞는 가훈이었다.



성씨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뒤 고택을 나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앞으로 몇십년 몇백년 뒤에서 저 고택이 있어 또다른 후손들이 또다른 이야기를 듣고 계속 써나갈 스토리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나와 그들에게 역사란 과연 어떤 의미를 동일하게 가지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