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 가운데 <은하영웅전설>이란 작품이 있다.

일본 작가인 다나카 요시키가 쓴 이 작품은 먼 미래의 은하계 패권을 둘러싸고 금발의 은하제국 황제 라인하르트와 자유혹성동맹의 양 웬리란 두 영웅이 다투는 스페이스 오페라다. 나는 이 소설과 애니메이션, 게임까지 너무 재미있게 즐긴 팬이기도 하다.


나는 이미 예전 포스팅인 <애플이 닌텐도에게 도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부터 언젠가 IT업계의 쌍둥이 기업 미국 애플과 일본 닌텐도가 결전을 벌이게 될 거라 예상했다. 

둘은 오랫동안 컴퓨터와 게임기라는 고유영역에서 나름대로 번영했지만 이제 스마트폰이 가져온 휴대용 소셜게임이란 영역이 둘의 결전장이 되어버렸다. 여기서 만일 싸우지 않고 어느 한쪽이 물러서면 그건 결정적인 세력약화와 몰락으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스티브 잡스가 당분간은 휴대용 게임기의 거장 닌텐도를 적으로 돌리지 않을 거라 보았다. 아직은 애플티비란 과제가 남아있고, 안드로이드와의 대결에도 힘에 벅차기에  친구로 만들 수는 없어도 적은 되지 않으려 노력할 거라 생각했다. 때문에 아무리 아이폰과 아이팟 터치, 아이패드가 휴대용 게임기로 유력하다고 해도 가급적이면 소니나 닌텐도의 심기를 건드리는 발언을 자제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역시 스티브 잡스였다. 힘겨운 상대와 싸우면서도 의도적으로 닌텐도에게 선전포고를 하고야 말았다. 하나도 두렵지 않으니 덤빌 테면 덤비라는 그 태도는 참으로 대단하게 보인다.

"아이팟 터치가 소니와 닌텐도의 휴대용 게임기를 합친 것보다 많이 팔렸다."

이번 미디어 이벤트에서 새 아이팟 터치를 게임센터 기능과 함께 소개하며 잡스가 한 말이다. 다른 기자들과 IT블로거는 이 말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이 어쩌면 커다란 역사를 만들 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생각 없이 말하는 스타일이 아닌 잡스로서는 많은 계산이 숨어있을 것이다. 특히 이 말이 콘솔 게임기와 휴대용 게임기 하나로만 역사를 만든 닌텐도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 있다는 정도는 당연히 알 것이다.

이것은 애플이 공개적으로 닌텐도와 소니에게 던진 도전장이다. 특히 주타겟은 당연히 현재 휴대게임기 1인자인 닌텐도다. 지금 아이폰이 제일 먼저 잠식해가는 게임시장은 간단한 캐주얼 게임이나 소셜게임으로서 원래는 닌텐도가 가지고 있었던 시장이기 때문이다.

애플로서는 소셜게임으로 대표되는 모바일 게임시장의 가능성이 나날이 커진다는 걸 알고 있다.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이어 소셜게임으로 옮겨가는 세계 게임시장의 움직임은 닌텐도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둘의 대결은 시간 문제다.

비싼 휴대폰에서 점점 아래로 내려오며 자이로스코프를 탑재한 새 아이팟 터치를 주력 게임기로 키우려는 애플이 은하제국이라면, 단가를 최소한으로 줄인 닌텐도 DS로 시작해 3DS로 기능을 넣으며 올라가 자기 영역을 지키려는 닌텐도는 자유혹성동맹이다. 제국에는 신경질적이지만 천재적인 전략가 라인하르트-잡스가 있고, 자유혹성동맹에는 불패의 마술사인 양 웬리- 미야모토 시게루가 있다. 둘이 휴대용 게임기라는 하나의 시장을 두고 벌일 일전은 너무도 기대되는 세기의 대결이 아닐 수 없다.


이미 싸움은 피할 수 없다. 혹자는 닌텐도가 그냥 애플의 좋은 써드파티이자 게임업체로 협력할 수도 있지 않겠냐고 말한다. 그러나 얼마전 뉴스에 의하면 닌텐도의 사장 이와타 사토루는 iOS용 게임을 내놓자는 주주총회의 제안을 거부했다. 그것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둘 다 만드는 닌텐도의 정신과 방침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 출처 : 엘렉트로니스타 )

이것은 닌텐도 스스로 타협의 여지를 없앤 선언이다. 그렇다면 애플이 먼저 손이라도 내밀든가 물러서야 평화가 성립되지만 스티브 잡스는 오히려 도발해버렸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선전포고와 일전뿐이다.



아마도 닌텐도에서 제대로 비전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있다면, 혹은 사장인 이와타 사토루나 게임의 신으로 불리는 미야모토 시게루의 직감이 죽지 않았다면 지금 전략회의를 하고 있을 것이다. 앞으로 새 아이팟 터치가 기존 미국시장에서 닌텐도의 영역을 무섭게 잠식할 것이 예상된다. 가만히 있다가는 판매대수도 감소하고, 1위자리를 빼앗길 수도 있다. 또한 거대 게임개발업체들을 애플쪽에 빼앗길 수도 있다.  애플의 게임기 진출이란 건 그 파급력을 상상하기 어려운데 수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둘은 아마도 닌텐도 게임이 플레이 가능한 스마트폰 시장 진출을 포함한 모든 가능성을 논의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가만히 앉아있어서는 닌텐도에게는 그저 시장을 빼앗기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


내년 봄에 닌텐도의 야심작 3DS가 발매된다. 일단 안경이 필요 없는 3차원 디스플레이로 한 발짝은 앞섰다. 그렇지만 애플을 상대하려면 겨우 한 발짝으로는 안 된다. 전력을 다해서 싸워야 한다.

그런데 두 기업의 피 튀기는 대결을 앞두고 나는 왜 이리 즐거운 지 모르겠다. 두 혁신기업이 서로 진지하게 전력을 다해 싸우면 대체 어떤 제품과 게임이 시장에 나올지 너무 기대되기 때문이다. 마치 <은하영웅전설>에서 나오는 금발의 미남 라인하르트와 마법사 양 웬리가 벌이는 세기의 대결이 겹쳐진다.


1만달러가 넘는 컴퓨터와 고가 스마트폰이란 하드웨어 시장에서 내려온 애플의 잡스가 화투 업체부터 시작해 저가 하드웨어인 패미콤에서 올라온 닌텐도의 게임 개발자 미야모토의 대결은 그런 면에서 닮은 모습과 다른 모습 둘을 전부 보여준다. 예전에 읽었던 은하영웅전설과의 매치는 이런 면에서 묘한 재미와 흥분을 더해준다.

어차피 이제 미래를 보면 비용점유율과 무게점유율이란 두 가지 싸움이 중요하다. 스마트폰에서 간략화된 저가 플레이어 VS 장난감 수준을 넘어선 최신 휴대용 게임기는 양립할 수 없다. 둘 중 하나는 시장에서 외면 받거나 사양세를 피할 수 없다. 닌텐도와 애플이 타협하지 못한다면 대결해서 어느 한쪽이 쓰러져야 한다는 의미다.


스티브 잡스는 미디어 이벤트에서 닌텐도에 도전장을 던졌다. 그럼 이제 남은 건 닌텐도가 어떻게 받아치느냐 하는 거다. 닌텐도의 반격은 어떤 것일지 즐겁게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