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란 조직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우선 국가는 그것을 결성한 개인이 가진 대의명분과 이념에 충실하다. 자유와 박애를 내세우며 만든 국가는 국제사회에서 어떤 현안이 발생했을 때 가장 먼저 국가의 창립이념에 비춰서 그 문제에 대처한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는 그래서 다른 나라의 인권문제를 서로 살피고 간섭하는 것이다.



거부권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국가는 그 구성원의 이익을 중시한다. 때로는 그 어떤 논리나 이념보다 먼저 국민의 생명과 이익을 위해 결정하고 행동한다. 예컨대 인질로 잡힌 자국민을 위해서 협상하거나 상공인을 대신해서 교역조건을 협의할 때 이런 면이 강하게 나타난다.


삼성과 애플이 벌이고 있는 특허전쟁에 있어 이런 두 가지 요소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두 기업은 분명 세계화된 글로벌 기업이다. 전세계를 상대로 비즈니스를 하며 세계 주요국가에 지점을 두고 있다. 그렇지만 엄밀히 말해서 보면 삼성은 한국기업이고 애플은 미국기업이다. 이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다보니 이해관계가 얽힌 각국의 재판과정에서 국적에 따른 차별이란 면이 부각되고 있다.  


안드로이드폰과 아이폰이란 양 진영 단말기의 주요 매출과 이익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두 회사의 재판은 그래서 중요하다. 미국법정에서의 1차재판에서 애플이 유리한 평결을 얻어냈다. 반대로 국제무역위원회(ICT)는 애플이 삼성의 표준특허를 침해했다면서 미국 수입금지를 결정하기도 했다. 여기까지는 크게 보아서 1대1의 스코어였다.


그런데 또 하나의 결정이 내려졌다. 오바마 대통령의 미국 행정부가 애플 제품 수입금지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한 것이다. (출처)



거부권



국제무역위원회(ITC)의 수입금지 결정에 대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삼성전자가 미국의 보호무역주의에 다시 한번 무릎을 꿇게 됐다.


ITC 결정에 대한 미국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1987년 이후 25년 만의 일로, 이번 결정은 극히 이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애플의 본고장 미국에서 ITC로부터 애플의 제품이 자사의 특허를 침해했다는 판단을 받아냈지만 오바마 대통령의 반대로 최종적으로 수입금지 결정을 얻어내는 데에는 실패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대해 국내 스마트폰 업계는 의외라는 반응이다. 한동안 거부권 행사의 전례가 없었던데다 거부권 행사가 특허 침해가 인정된 제품의 수입을 허용했다는 나쁜 선례를 남기고 ITC의 권위를 깎아내리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오바마 대통령의 지시로 거부권 행사 여부를 판단한 무역대표부(USTR)의 마이클 프로먼 대표는 "미국 경제의 경쟁 여건에 미칠 영향과 미국 소비자들에게 미칠 영향을 검토했다"며 "특허보유권자가 법원을 통해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 거부권 행사 사유를 밝혔다.


미국 최대 이동통신사 버라이즌의 랜달 밀히 부회장이 월스트리트저널(WSJ)에 거부권 행사 촉구를 시사하는 글을 기고했고, 다른 이통사인 AT & T 역시 미국 무역대표부에 애플 제품 수입금지에 거부권을 행사하라고 촉구하는 등 노골적으로 애플의 편을 들었다.


국내 업계 관계자는 "미국 행정부가 독립적 준사법기관인 ITC의 판단을 부정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내렸다"며 "특허 침해라는 판단을 하고도 해당 제품이 시장에 버젓이 돌아다니도록 허용을 해준 것"이라고 말했다.


과연 이번 결정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미국이 정말 보호무역주의로 선회한 것일까?


애플 제품 수입금지 거부, 보호무역주의인가?



거부권


예를 들어 미국은 국제기구의 결정과 각종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국에 유리하게 적용한 적이 많다. 주로 군사적인 면에서 많이 보이지만 미국은 미군에 대한 국제사회의 사법적 결정에 대해서 예외를 적용해달라는 요구를 강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그런 행동이 국제기구를 전면적으로 무시하는 건 아니었다.  


미국은 다른 국가에 대해서 주로 대의명분에 의거해서 국제기구를 통해 압박을 가한다. 군사적인 면에서는 국제연합(UN)을 거치며, 경제적으로도 세계무역기구(WTO)를 거쳐 통상압력을 행사한다. 미국만의 이익이 아니라 국제사회의 룰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런 기구의 결정이 결정적으로 미국의 이익을 침해하게 되면 종종 결정을 무시하는 행동을 해 왔다. 주로 미국인의 안전이나 미국경제의 이익을 위한 일에 그렇게 대처한다.


엄밀히 말해서 미 국제무역기구(ITC)는 미국의 준사법기관이지만 객관적인 국제기구가 아니다. 다만 이 기구는 정부기관이 아니며 따라서 최종적으로 미국행정부의 수장인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이 사법부의 결정에 대해 대통령이 사면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거부권


현재 국내 언론에서는 이번 결정을 두고 보호무역주의가 시작된 것이란 의혹을 강하게 제기하고 있다. 사실 불공정한 결정이기는 하다. 예를 들어 주요한 범죄자에 대해서 재판부에서 유죄판결을 내리고 실형을 내렸는데 대통령이 사면권을 행사했다고 치자. 그렇다고 그 범죄자가 무죄가 된 것은 아니다. 유죄이지만 대통령이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권리를 행사해서 형의 집행을 중지한 것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애플제품의 특허침해를 둘러싼 이번 미국정부의 결정은 특허침해에 대한 본질적 판단이 아니다. 즉 애플제품이 삼성의 특허를 침해했다는 판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다만 그 집행으로 애플제품을 미국에서 팔지 못하는 것이 심각하게 미국민의 이익을 침해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따라서 이번 결정은 불공정하긴 해도 전체적으로 미국의 무역기조가 보호무역으로 바뀐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다만 미국이 자국국익을 위해 준사법기관의 결정을 무시한 판단일 뿐이다. 


이 거부권은 앞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상호주의 원칙에 의해서 한국이 삼성제품을 둘러싼 국제기구의 어떤 결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한다고 해도 미국 정부는 일정부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거부권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만일 국제무역위원회가 삼성제품의 미국수입금지를 결정했을 때도 거부권을 행사해도록 압박을 받을 것이다. 미국경제가 아니라 미국소비자의 이익이란 측면에서 본다면 선택권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결정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지 한번 지켜보자.